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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주하 목사] 영적 조바심 - 4(아가서 1:7)

  • 설교영상
  • 입력 2019.10.01 08:00
  • 수정 2019.10.29 08:23

오늘은 아가서 1:7을 근거로, “영적 조바심”이라고 하는 제목을 가지고,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누기로 하겠습니다.

아가서 1:7의 말씀입니다. “7.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야, 네가 양 치는 곳과, 정오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말하라, 내가 네 친구의 양 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린 자 같이 되랴” 아멘. 조금 쉬운 성경으로 읽어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7. 내가 사랑하는 임이시여, 오늘은 당신이 양떼를 어디서 먹이며, 정오에는 어디에서 쉬는지 말해 주십시오. 어찌하여 내가 이리저리 방황하며, 당신 친구들의 양떼 가운데서, 당신을 찾아야 합니까?”. 아멘.

본문에 나오는 “얼굴을 가린 자”는 이 노래의 주체인 술람미 여인 자신을 지칭합니다. 풍유적인 비유법에 따라 쓰여진 이 노래에 의하면, 사랑에 빠진 여인은, 양떼를 먹이려고 이리저리 이동하는, 사랑하는 목동을 만나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 하고 있습니다. 양떼를 몰고 나간지가 꽤 오래 되었는데, 어디쯤에서 양떼를 먹이고 있다는 소식도 없고, 편지를 쓸 수도 없고, 휴대폰도 때릴 수 없으니, 기다림에 지친 여인은 얼굴에 너울을 가리고, 다른 목동들의 뒤를 따라, 그녀가 사모하는 목동을 찾아 나서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사랑에 빠진 여인의 간절함과 조바심치는 사랑의 열정을 느끼게 됩니다. 얼마나 사랑하는 이의 모습이 보고 싶었으면, 자신도 임시 목동이 되어 거친 사내들을 따라다니며 자신의 사랑하는 목동을 찾으려고 했겠습니까?

그런데 유목 문화적인 배경에서 이 본문을 읽으면 조금 전에 말씀드린 해석이나 뉘앙스에서 조금은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때때로 유목문화권에서는 얼굴을 가리고 목동들을 따라다니는 여인이 창녀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지고지순하고 정숙한 여인으로 알려져 있는 이 여인이, 파격적인 창녀와 같은 행색을 하고, 자신의 사랑하는 목동을 찾아 나선다는 해석은 조금은 선정적인 해석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특히 고대 이스라엘 역시 농업문화권보다는 유목문화권에 비교적 더 큰 영향을 받고 있었으므로, 이전의 해석과 조금 다른, 후자의 해석이 오히려 좀 더 사실에 가까울 수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많습니다.

이러한 주장을 근거로, 사랑하는 목동을 향한 이 여인의 사랑의 노래를 간략하게 분석해 보면, 첫째, 자신이 창녀로 오해를 받는 그러한 위험까지 무릅쓰며 목동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 ‘사무치는 그리움’과, 둘째, 자신이 창녀로 오해를 받으면서까지 목동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도록 자신의 소재를 밝히지도 않고 있는, ‘목동에 대한 투정과 원망’을 동시에 토로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양떼를 먹이는 곳”은 양들을 위한 양식이 있는 곳으로서 현대의 교회들을 상징합니다. 성도들은 주님의 말씀의 교훈을 사모하며 그 교훈이 있는 교회를 찾아 헤맵니다. 그런데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자신의 심령을 만족시킬 수 있는 교회를 찾아 헤매는 것을, 교인 본인의 문제로만 치부할 할 수도 있겠지만, 여러 가지 이유들로 인해서 그 많은 교회들 중에 자신의 심령을 충족시켜 주는 교회가 흔하지 않다는 점 역시 한번쯤 진단해 볼만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일부 대형 교회의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 많은 교역자들, 훌륭한 성가대들, 강한 카리스마로 신격화 된 목회자들, 진정 믿음이어야 할 것을 현대인의 교양쯤으로 착각하는 교회분위기 등으로 인해서, 만약 예수 그리스도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면 문제는 아주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모든 것을 다 양보한다 하더라도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마지막 보루는 교회의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지중해 연안의 국가들은 한 낮에는 매우 무덥기 때문에 ‘시에스타(siesta)’라고 하는 두세 시간의 낮잠 시간을 갖습니다. 더위의 공격으로부터 벗어나서 시원한 피난처에서 안식을 취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정오에 쉬게 하는 곳”은, 가장 덥고 견디기 힘든 시간에 잠시 몸을 피할 수 있는 피난처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곧 환란과 고통의 시간에 쉴 수 있는 안식처를 상징합니다. 그렇습니다. 환란이 닥쳐올 때 성도들이 피할 수 있는 곳은 주님의 피난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때때로 주님의 모습은 감추어져 있고, 참된 교회의 모습도 잘 보이지 않습니다. 안타깝게도 참된 교회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때마다, 본문의 “친구들”이 가리키는 이 세상의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대로, 으레 대중적인 인지도가 높은 이단 사이비의 거짓 지도자들을 가리킬 때가 많습니다. 우리들이 이미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그러한 곳에서는 진정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 수가 없습니다. 특별히 “얼굴을 가리운 자와 같이 된다”는 구절을 통하여, 거짓 신들과 거짓 지도자들이 판을 치는 이 세상 속에서는 진정한 참 진리의 신을 찾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본문의 말씀에 기록된 바와 같이, 조바심을 치며, 사랑하는 연인을 찾아 헤매는 이 여인의 모습에 현대의 기독교인들을 대입해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목동을 만나기 위해서 조바심치는 모습이 마치 영적 목마름으로 몸부림치는 현대의 기독교인들의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대의 기독교인들의 영적 조바심은 왜 발생하는 것입니까?

첫째, 현대 기독교인들의 영적인 조바심의 원인은, 외적인 것에 지나치게 사로잡혀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실존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안목의 정욕이 진리를 찾는 눈을 흐리게 만듭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만, 예컨대 일반적인 사람들의 심리는 좀 더 크고, 좀 더 교인이 많고, 좀 더 화려하고, 좀 더 깨끗하고, 좀 더 안락하고, 좀 더 편하여, 외적 허영심이나 지적인 허영심 등을 비교적 더 많이 충족해 줄 수 있는 교회를 찾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규모나 시스템 면에서 모든 것을 제대로 다 갖춘 교회들이 영적 갈증 등을 해소하는 일에 더 도움이 될 것으로 인식될 뿐만 아니라, 상대적으로 헌신의 책임은 비교적 작다는 것이 매우 큰 매력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예배에 한번쯤 빠져도 표가 나지 않는 것이나, 나 말고도 헌신할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나의 이기적인 내 방식으로 편하게 교회생활 할 수 있다는 점 등이 그 사례에 해당될 수 있습니다.

수만 명의 교인을 자랑하는 대기업과 같은 교회에서 사역을 해봤습니다만, 개인적인 영적인 상태는 대기업처럼 큰 규모나 다양한 시스템에 비례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풍요 속의 빈곤”이라고 하는 말이나, “영적 외화내빈”이라고 하는 단어가 뼈저리게 다가올 수 있는 영적 아쉬움이 존재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만약 외적인 부요함만을 보고 교회를 선택한 사람들이 있다면,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항상 영적인 갈증과 영적인 조바심이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가능한 육신의 눈을 감고 영혼의 눈을 밝게 떠야만 믿음을 지킬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둘째, 현대 기독교인들의 영적인 조바심의 원인은, 영적인 탈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제 아무리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한 사도바울과 같은 사역자라 할지라도, 때때로 영적인 좌절감을 맛보게 됩니다. 사실 주기적으로 영적 탈진 상태를 경험하는 사역자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하면서 탄식했던 사도바울의 고백은 지독한 영적 조바심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영적인 탈진이나 영적인 좌절감이 영적인 조바심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또한 로뎀나무 아래에서 죽기를 구했던 엘리야 선지자의 모습 역시 많은 신앙인들에게 반면의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갈멜산에서 450명이나 되는 바알숭배자들과의 영적 전쟁을 통하여 은사로 받은 엘리야 선지자 자신의 위대한 능력을 발휘했지만, 계속해서 사악한 최고의 권력자들로부터 쫓기는 신세가 되자, 영적으로 탈진하게 되어 영적인 함정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가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하나님 앞에 떼를 썼던 장면은 영적 탈진 상태에서 빚어진 영적 조바심의 증상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될 수 있습니다. 역으로 말씀드린다면, 영적인 조바심을 극복하고자 하는 성도들은 영적인 탈진의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현대 기독교인들의 영적인 조바심의 원인은, 주님을 향한 갈급한 사랑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두 가지의 원인이 부정적인 것이라면, 지금 말씀드리는 원인은 매우 긍정적인 경우에 속합니다. 예컨대 처음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서로에 대한 갈망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낮이나 밤이나, 아침에 눈을 뜰 때부터 밤에 잠을 잘 때까지, 항상 사랑하는 상대와 함께 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자신의 생각으로부터 지울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꿈에서도 나타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성령충만한 성도들도 이와 같습니다. 성령의 충만하심은 주님을 얼마나 뜨겁게 사랑하는가, 주님을 얼마나 더 사무치게 갈망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성령충만할 때는 눈만 뜨면 주님 생각이 자신의 모든 생각을 장악하여 지배합니다. 어떻게 하면 더 주님을 깊이 알 수 있을까 하는 거룩한 짝사랑으로 뜨거워집니다. 때때로 찬양을 통하여 주님을 향한 뜨거운 마음을 달래어 봅니다. 신령한 기도를 통하여 주님을 향한 간절한 열정을 발산시켜 봅니다. 그래도 무언가 아쉽습니다. 주님의 신비에 더 가까이 가기를 원하는 심령이 다시 불타오릅니다. 이와 같이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그 사랑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도 넓은 것임을 잘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열정이 영적 조바심으로까지 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왕을 향한 술람미 여인의 사랑도 이와 같습니다. 왕을 암시는 사랑하는 목동을 만나기 위해서, 자신을 암시하는 “얼굴 가린 자”가 되어, 다른 거친 목동들을 따라 이리저리 헤매는 자와 같은 심정이 될 정도로, 왕을 사랑하는 마음이 견딜 수 없이 뜨겁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거룩한 뜨거움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소원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영적 탈진이나 좌절을 의미하는 부정적인 조바심은 어두움의 세력들이 좋아하는 것이기에, 우리 성도들이 극복해 나가야 할 주제입니다. 다만 부정적인 영적 조바심은 성령과 진리의 예배를 통한 말씀과 찬양과 기도로써 극복해나갈 수 있습니다. 나아가 긍정적인 영적 인 조바심은 거룩한 믿음의 열정으로 승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러한 조바심은 우리들의 믿음을 첫사랑과 같이 늘 새롭고도 뜨겁게 만드는 각성제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만드신 교회를 통하여 더욱 충성하게 하는 헌신의 에너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더욱 뜨겁게 사랑하기를 원하는, 긍정적인 영적 조바심으로 늘 충만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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