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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폴리티쿠스, 그리고 교단정치

  • 칼럼
  • 입력 2019.02.20 15:59
  • 수정 2019.02.21 07:11

<칼럼>

글 : 임원주 목사

 

임원주 목사

힌두교와 불교는 그 근본을 유야독존적인 ‘참된 나’를 찾기 위해, 심지어 ‘나’라는 인식조차도 부인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는 데에 둔다. 그래서 두 종교는 ‘나’라는 존재를 둘러싼 모든 사회적 관계와의 ‘인연’을 끊는 것으로 종교수행을 시작한다. 이런 수행법이 유행하면 나라가 망한다. 이 때문에 인도는 출가수행을 ‘바라문’ 계급에게만 허용했었고, 그 이하의 계급에게는 훗날 ‘마누법전’을 편찬하여 그 법령에 따라 살게 했다. 이 방법으로 힌두교라는 종교와 국가가 보존될 수 있었다. 불교가 국가에 미치는 해악을 경계하기 위해 당나라 이후에 수차례에 걸쳐 불교를 억압했고, 불교는 산으로 들어갔다.

현실적으로, ‘참된 존재로서의 나’라는 존재는 존재함과 동시에 주변인들과 겹겹이 얽힌 관계망에 의해 규정되고 규정함으로써 이뤄진다. 이 관계망의 핵심에 ‘정치’라는 것이 놓여 있다는 것이 ‘호모 폴리티쿠스’라는 말을 하는 까닭이다. 사람이란 자신이 놓인 환경이 정치적이기에 사람이 그 환경에 반응하고 적응하고 따라서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동양문명에서는 ‘정치’(政治)란 자신의 부조화스러운 면을 다스려 극복한다는 의미의 정(政)과 타인이 부조화스러운 면을 극복하는데 도움을 준다는 의미의 치(治)의 조합이라고도 설명한다. 이러한 차원과 개념에서의 ‘정치’란 ‘수기치인’(修己治人)에 다름 아니고 수양(修養)일 뿐이다. 이를 성경의 가르침에서 찾자면 ‘이웃 사랑’의 윤리 혹은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사랑을 공급하라”에 해당할 것이다(벧후 1:5-7).

‘호모 폴리티쿠스’라는 서양적 개념이든 정치(政治)라는 동양적 개념이든 그 출발선에서는 ‘힘’(power)이라는 개념이 없다. 그러나 온갖 위험에 노출된 생존환경/생활환경 때문에 사람들은 ‘마을’을 만들고 조직을 만들고 ‘나라’를 만든다. 이 과정에서 ‘힘’과 ‘지배력’을 동경하고 ‘정치란 곧 정치권력이다’라는 관념에 함몰되기 십상이다. 그러면 ‘정치권력’을 잡기 위한 정치투쟁이 곧 정치가 되고, 정치권력을 잡는 목적은 모든 좋은 것을 독식(獨食)하는 힘을 갖기 위한 것이 된다. 이렇게 되면 정치행위에서 옳고 그름, 의(義)와 불의(不義), 경건과 불경건, 거룩과 속됨의 구별은 없어진다. 그 대신에 승자(勝者)가 되기 위해, 권문세가(權門勢家)가 되기 위해, 세도를 부리기 위해, 권모술수를 부리고 온갖 패악질을 정당화한다. 여기에서 더럽고 추한 속된 정치가 만들어진다. 침례교인들은 이런 ‘정치’ 개념을 혐오한다.

하지만 내가 그리고 우리가 ‘침례교인’이라는 사실에 이미 정치가 존재한다. 그 정치가 어떠한 정치이냐에 따라 ‘나’와 ‘우리’ 즉, 침례교단의 현재와 미래가 가늠된다는 것은 정치원리의 기본이다. 옛스럽게 표현하자면, 그 나라(조직)가 장차 어찌될지를 보려면 그 왕(조직의 우두머리)을 보고, 그 왕이 어떤 사람인지(어떤 정치를 하는지)를 보려면 그가 어떤 사람을 주변에 두고 기용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 침례교단이 어떤 정치를 행하는 집단(조직)인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올바른 정치를 도모하는 집단인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역겨워하는 추악한 집단인지를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한다. 우리가 오늘 어떠하며 장차 어찌될지는 ‘총회장’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총회장이 어떤 인물이며 어떤 정치를 행하는지를 알려면 그가 가까이 하는 인물들, 그가 기용하는 임원들의 면면과 그들이 일하는 방식을 보면 알 수 있다.

2018년 9월 경주 정기총회에서 선출된 제108차 총회장을 보면 우리 교단의 현재와 미래가 보인다는 뜻이고, 제108차 총회장이 어떤 사람이며 우리 교단의 장래가 어찌될지를 좀 더 정확하게 알려면 총회장을 보좌하는 임원들과 그들이 일하는 방식을 보면 정확하게 진단된다는 뜻이다.

거두절미하자. 단적으로 말하자. 교단총무를 역임한 홍00 대의원(목사)이 2019년 1월 29일자로 제108차 임원 5인과 감사 1인에 대해 임원선임 결의 무효를 확인하고 이들의 직무집행정지를 구하는 가처분 신청을 서울남부지방법원에 접수하였다. 홍 목사가 가처분 신청을 접수한 이유는 크게 셋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첫째, 이 임원들은 총회규약이 정한 기준에 미달하는 무자격자들이다.

둘째, 정기총회/임시총회를 통해 대의원들로부터 정당하게 인준받지 아니한 채 직무를 수행하고 있다.

셋째, 무자격자들이 편법(불법)으로 취임하여 행하는 업무 또한 불법투성이다. 자격유무를 떠나 그들이 행해 온 업무가 교단에 유익을 끼치고, 목회자들을 세우는 사역이 되었더라면 아마 가처분신청을 하지는 않았을까 싶다.

필자는 이 세 가지에 대해 과연 제108차 총회장과 임원들이 어떻게 답변을 할지, 어떻게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할지 몹시 궁금했다. 이 건은 서울남부지법 제51민사부에 배당되었고 ‘2019카합20030 직무집행가처분’ 건으로 2월 27일 14시 30분(제310호 법정)으로 심문기일이 지정되었다.

2월 8일에 채무자측(제108차의 6인 임원들) 답변서가 접수되었다. 정말이지 총회임원들의 답변서란 것이 놀라웠다. ‘변론’의 내용도 논리도 전혀 없었다. 그저 문제의 임원 6인 모두가 2월 6일자 혹은 7일자로 사임했으니 판사에게 소를 ‘취하’해달라는 말뿐이다. 첨부서류라는 것도 해당 임원들의 사임서들 밖에 없었다. 그 문건을 보는 순간 필자는 ‘장난하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참으로 괴이쩍다. 사임서들이라는 것들도 한결같이 “사임을 허락해달라”는 청원들이지 사표가 정식으로 수리되었다는 확인서가 아니다. 판사들이 순진하게 ‘사임서’를 보고 소를 각하하고 총회장이 사표를 반려하면 다시 임원 노릇하겠다는 뜻이 아니고 뭐겠는가? 변론의 여지가 없이 ‘불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임원으로 기용하고 총회장에 의해 임원으로 기용되었으니 임원 노릇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뭐겠는가? 권력에 눈이 멀고 ‘총회임원’이라는 명예에 도취한 사람들이 아니고서야 어찌 이런 답변서를 내놓을 수 있을까? 어찌 이들의 눈에 총회대의원들이 있다고 할수 있을까? 총회대의원들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복음을 위해 교단정치를 하겠다는 인물들이라고 볼 수 있겠는가? 교단의 장래가 훤히 보인다.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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